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문단 편집) == 진행 양상 (1866) == 오스트리아는 체면을 지키기 위해 선전포고했으나 전술한 대로 전쟁 준비는커녕 누적된 재정난과 군대 손실, 헝가리 진압 등 전쟁수행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독일 연방국에 기대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위주의 독일 연방에선 북독일 군소 제후국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나라가 오스트리아를 편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기간 전쟁 준비를 해온 프로이센의 공세를 막을 수 없었다. 국제정세도 변했는데 이미 프로이센은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남북에서 오스트리아를 협공하기로 합의한데다가 크림 전쟁 때 오스트리아에 뒷통수를 크게 맞은 러시아가 과거 전통적 우방이던 오스트리아를 버리고 친프로이센 정책을 펴기로 해서 프로이센이 매우 유리해졌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신생 이탈리아가 크려면 오스트리아의 기세를 꺾어놓야야 한다고 오판하고 있었고 프로이센에 중립의 대가로 팔츠 지방 란다우, 프로이센령 자를란트, 독일연방 요새인 [[룩셈부르크]]와 [[벨기에]] 지역 일부 또는 전부를 원한다는 말도 안되는 협상안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고 나폴레옹 3세는 이를 묵시적 동의로 착각했다.[* 라인란트 전체 병합을 제시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대규모 상비군을 갖춘 [[프로이센군]]은 [[철도]]를[* 프로이센은 전쟁 전 철도 5개를 완공하여 엄청난 통신과 수송 효율성을 보여준 반면 오스트리아는 전쟁 도중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사용할 수 있었던 철도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이미 프로이센 군부는 철도의 유용성에 주목하여 철도 통제권을 군이 보유하고 있었기에 평시에도 원활한 작전수행과 훈련이 가능했다.] 이용하여 신속하게 병력을 전선으로 전개해 [[오스트리아 제국군]]을 거세게 몰아붙였으나, 오스트리아는 병력 동원에도 시간이 걸리고 철도 총연장도 형편없이 부족해 병력 전개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탈리아의 선전포고는 사실 몇 달 전에 이미 비스마르크와 약속된 것으로, 비스마르크는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비밀리에 공수동맹을 맺고 대신 오스트리아령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이탈리아에 넘겨주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오스트리아도 중립의 대가로 같은 제안을 했으나 오스트리아는 이미 이전에 이탈리아 통일을 두고 맞선 적국이었으며 미수복 오스트리아령 이탈리아인 우세지역[* [[트렌티노알토아디제]]의 [[트렌토]],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반도]], [[달마티아]] 등.]을 탈환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와 우호적 중립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독일 지역에서는 프로이센이 예상대로 오스트리아의 동맹국들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면서 쉽게 제압했다. 사실 전쟁 초기 하노버군이 프로이센군을 소규모 전투에서 격퇴한 적도 있지만 승전 이후 바로 항복해야 했다. 병력과 탄약이 떨어져서... 프로이센을 제외하면 다른 중소국가들은 전시도 아니고 대병력을 유지하지도 않고 장비가동도 형편없었다. 주 전장인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선에서는 개전 초기 작은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군에게 연달아 패하고 결국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간의 국경지대까지 진격했다. 이에 오스트리아군은 작센군과 연합하여 21만의 대군으로 [[보헤미아 왕국|보헤미아]]의 [[흐라데츠크랄로베|쾨니히그레츠]](Königgrätz)에서 결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7월 3일]] [[헬무트 폰 몰트케]]가 직접 지휘한 프로이센군은 28만병력으로 적지에서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을 맞아 압승을 거두었다. 프로이센의 전사자가 2,000명도 채 안 되는 데 비해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은 약 13,000명에 달하는 전사 및 실종자에 22,000여 명의 포로까지 발생하면서 결전에서 참패해 전황은 순식간에 기울었다. 이 전투는 [[전장식]] 소총을 이용한 오스트리아군과 [[후장식]] 소총으로[* 프로이센군이 이용한 [[드라이제|드라이제 니들건]]이 대표적이다.] 장비를 교체한 프로이센군의 대결로 유명하다. 후장식이 전장식보다 더 좋은 점은 일단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장점은 뒤에서 장전하므로 엎드려서 장전 및 사격이 가능, 즉 엄폐하면서 사격이 가능해졌다는 것이고, 두 번째 장점은 전장식에 비해 무려 6배(!)나 빠른 연사력을 가진다는 점이다. 결국 보병간의 사격전에서는 프로이센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는 것이다. 다만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양군이 장비한 소총의 질적 차이로 프로이센군이 전투에서 아주 압도적이었고 그것이 전투의 승패를 결정 지은 것은 아니었다. [[쾨니히그레츠 전투|사도바 전투]][* 전투가 쾨니히그레츠(Königgrätz)와 사도바(Sadowa) 근방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쾨니히그레츠 전투라 하기도 하고 사도바 전투로 부르기도 한다. 즉 위에서 말한 전투와 같다.]를 지휘한 [[헬무트 폰 몰트케|몰트케]]는 병력이동을 분산한 후 전투에서 결집하는 방식을 썼는데 이는 철도와 전신 이용으로 가능한것이었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배분한 병력 이동과 배치를 통해 당시 이전과 다른 전술을 썼으므로 당시 군인들은 철도 통신의 수단의 위력을 잘 알지 못했으며 몰트케의 병력이동과 배치를 매우 위험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몇시간만 늦었어도 졌다 ㅎㄷㄷ"는 것이지 이미 작센과 슐레지엔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작센군은 개박살이 나서 보헤미아까지 추격당한 패잔병이었고 적지임에도 프로이센군의 병력과 화력이 오스트리아를 압도했던 것이다. 실제로 사도바 전투 이전 십수번의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가 이긴 건 달랑 한 번 뿐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인 베네데크 장군은 전략적 능력은 떨어져도 전술적 능력은 훌륭했고 스스로의 능력을 잘 아는 그는 자신의 능력을 살리기 위해 쾨니히그레츠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했고 희망을 걸었다. 그리고 전투 초반 프로이센군이 초반에 엄청 고전했다. 비스마르크와 몰트케의 [[담배]] 야사[* 전투가 한창 진행될 당시 몰트케의 지휘부에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1세가 방문했다. 이 때 비스마르크는 몰트케에게 담배갑을 건네며 한 대 피울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이 담배갑에는 썩어서 맛이 간 담배와 정상적인 담배가 있었다. 몰트케는 이 중 정상적인 담배를 골라서 피우며 상황을 설명하였고,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에게 "이 전투는 이겼으니 돌아가시죠." 라고 말했다. 격렬한 전투로 아군이 피해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휘관인 몰트케가 맛난 담배를 골라서 피울 정도로 침착하게 지휘하고 있으니 승산이 크다고 비스마르크가 판단했다는 이야기다.]가 생긴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대로만 진행되었다면 오스트리아가 이기거나, 프로이센이 이기더라도 엄청난 피해를 입고 끝났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양군이 맞선 가운데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왕태자]]가 이끄는 프로이센 2군이 전선 측면에서 나타나자 오스트리아군은 혼비백산해서 전투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소총의 경우 프로이센이 확실히 우월했지만 [[포병]]에서는 오히려 오스트리아보다 뒤떨어졌고 이것도 초반 고전의 원인이 됐다. 따라서 종합하자면 이 전투에 한해서는 프로이센군이 우월해서 진 것이라기보다는 오스트리아군이 삽질해서 스스로 자폭한 것이 패배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오스트리아군의 삽질은 여전히 신분제 및 비효율적인 통신체계에 기초한 전근대적인 지휘체계를 가진 오스트리아군과 참모본부를 중심으로 한 지휘체계의 혁신을 달성하고 근대적인 통신망을 갖춘 프로이센군의 차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나름대로 선전하며 방어전을 수행했고, 특히 리사 해전에선 양적 열세인 해군력으로 이탈리아 함대를 격파하는 등 선전했다. 이 리사 해전은 도시전설인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에도 올라온 것처럼 이탈리아군의 삽질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다만 굳이 이탈리아를 변호하자면,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 국가를 이룬지 10년도 안된 신생국이었다. 통일 이탈리아의 전신인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오랫동안 항구가 [[니스|니차]] 하나뿐이었고 [[제노바]]가 있는 [[리구리아]] 지역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빈 회의]]에서 얻었던지라 해군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내륙강국이라 할지라도 수십년 동안 해군을[* 오스트리아 해군은 1797년 베네치아를 합병한 뒤 베네치아의 잔여 해군 인프라를 바탕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운용해 본 경험이 있고 따라서 그 질이 상당했다. 그 우세를 잘 이용해서 충각 돌격을 절묘하게 활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선전에도 불구하고 주적인 프로이센군이 파죽지세로 보헤미아를 석권할 기세를 보이자 오스트리아는 [[7월 26일]]에 황급히 휴전조약을 체결했다. 7주만의 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